1. 현재 작업에서 가장 다루고 싶은 지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삶의 부조리에 대해 다루고 싶었어요. 주제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해 보고 싶어서 배나 꿈, 피자와 치킨 같은 키워드를 가지고 그림을 그려서 이어지는 스토리를 만들었습니다. 다음에는 죽음 같은 큰 주제들을 다루어 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지금은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회사에 다니면서 작업을 하다 보니 전체적인 기획을 명확하게 잡지는 못했고 작은 칸에 조금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칸들을 재배열해서 스토리가 탄생하게 됐고, 더 매끄러운 스토리를 위해 사이사이에 내용을 채워 넣었어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사회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나 불만족 같은 것들이 그림에 나왔던 것 같고, 그 상황에 맞게 작업 형식이 나왔던 것 같아요. 사실 그때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기준으로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그전 연도에 졸업 전시를 하면서 저도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한번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친한 선배인 버드핏 작가와 프이치스튜디오의 희애라는 친구랑 세명이서 콜렉티브로 핌플이라는 가상의 출판사를 만들고 책을 냈어요. 지금은 각자의 개성이 뚜렷해져서 같이 활동하지는 않는데, 그때의 기억이 저는 좋았어요.
2. 작업에는 항상 여러 방면에서 제약이 발생하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타협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까요?
타협해도 최대한 결과가 좋은 게 뭘지 생각해요. 작가라고 하면 처음부터 목표 주제가 있고 그것에 대한 상세 방안들이 연역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디자인 베이스다 보니, 판형이나 금액 같은 제약 사항에 맞추는 것부터 하게 됐던 것 같고, 그런 제약들이 결과물의 특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 같아요. 첫 번째 설명해 드린 것처럼 칸에 제약을 둔 것도 레이아웃 상에서 순서 배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맞아떨어지게 설계하게 됐어요.
3. 작가 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느꼈던 지점들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지금까지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동기라는 게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부적으로는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삶을 살아보다 보니 정말 하고 싶었던 것에 대해 느낀 게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오히려 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벌었던 게 작업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긴 해요. 만약 제 돈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면 경제적인 타격이 엄청나게 컸을 것 같거든요. 회사에 다니면서 알게 된 인맥과 스킬셋으로 지금도 프리랜서 작업을 하고 있고요. 그래서 현실적으로 봤을 때 경제적인 부분이 실질적인 원동력이 됩니다.
4. 작가님께서는 사용하시는 매체나 재료의 변화와 관계없이, 러프한 질감의 선적인 요소를 활용하며 높은 밀도의 구성을 보여주시는데요, 이처럼 세밀한 부분까지 디테일을 쌓아 올리는 표현 방식을 유지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거의 스케치 없이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런 러프한 부분들이 생기는데, 그런 질감들이 좋아서 이런 방식이 나오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재료에 대한 탐구가 중요하다고 느껴서 최대한 다양하게 사용하려고 하는데, 이런 물성이 디테일을 만들어서 그림의 결과에 곱하기가 되는 것 같아요.
5. 작가님께서는 거시적인 측면의 사회문화적 이슈에 대해, 그리고 그 위계의 분리와 선택에 대해 다루고 계시는데요, 전체적인 테마와는 반대로, 소재는 매우 사소하고 가볍게 보일 수 있는 음식 요소들로 이루어지는 대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중에서 피자와 관련된 소재를 메인 오브제로 자주 등장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처음부터 그런 것에 대해 다루고자 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그런 부분들이 얽히면서 풍성해지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배달 음식 중에 피자 치킨을 제일 많이 시켜 먹거든요. 뭘 먹을지 선택을 못 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었어요. 자전적으로 나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하다 보니 내가 속한 세상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부분까지 건드리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느끼기에 이념도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해서, 그런 사소한 차이가 사람의 인생도 바꾸게 되고, 어떤 사건에 대한 사소한 의견 차이로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이나 이데올로기도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거창하게 피자가 어떤 철학적인 의미가 있다거나 하는 것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그런 단면들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6. 작가님의 작품들은 복잡한 구성의 이미지가 느슨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배열되며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것으로 느껴졌는데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줄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구성을 활용하게 된 동기가 있을까요?
같은 판형에 그림을 그려서 배열하고, 다시 중간중간을 채워놓고 하는 방식으로 직업을 하다 보니까 느슨한 스토리가 나오게 됐고, 이해를 돕기 위해 스테이트먼트를 썼어요. 그랬더니 제가 그린 것보다 더 많은 해석도 나오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한국 시장이 크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시장이라는 게 취향이 있잖아요. 만약 책을 400권을 만들었는데 200명만 내 그림을 좋아한다면, 이제 또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가야 하는 거죠. 그런 부분에 대해서 해외 페어까지 생각하다 보니 영문으로 쓰는 것이 장점이 되더라고요.
7. 저는 작업의 시각화에는 획일적인 해석을 피하기 위해 추상적이고 모호한 표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접근은 불친절한 소통방식으로 인해 전달력이 낮아지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작품의 모호성에 관해서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스토리를 다시 생각하고 그 스토리에 맞춰서 다시 그림을 그리는데, 그 과정이 순환 반복되면서 느슨하고 모호해지게 되고, 의미가 추가적으로 생성돼요. 『Pizza or Chicken?』, 『Pizza Saver』, 『The Heaven and the Sinner』 세 권에서 이야기가 이어지는 구성이 나타나는데, 책에 완결성이 있었다면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 느슨함 덕분에 에피소드 형식으로 다시 이야기를 추가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어떤 주제를 전달할 때 의도적으로 모호성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런 선택에서 자신만의 특성에 따라 모호성이 추가되면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아요.
8. 『Peardrop』부터 이원섭 디자이너와 함께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협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책을 출판하는 과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이원섭 디자이너가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예요. 그래서 제 작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저도 그 친구의 디자인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제가 농부처럼 원재료를 수확해서 주면 그 친구가 요리사처럼 요리를 하는 거죠. 『The Heaven and the Sinner』는 이원섭 디자이너와 같이 스튜디오 kontaakt를 운영하는 박원영 디자이너가 그림의 순서나 크롭 방식같은 부분에 대해 아이디어를 많이 줘서 좋은 결과가 있지 않았나 싶어요. 『Pizza or Chicken?』이나 『Pizza Saver』같이 단순 페이지네이션으로 구성된 책들은 제가 만들었어요. 표지는 실크 스크린으로 인쇄했는데, 초판은 제가 직접 찍었어요. 투자할 때는 투자하고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손으로 하면서, 사람들이 좋아할 요소에 힘을 줄 수 있게 강약 조절이 필요한 것 같아요.
9. 2015년부터 전시와 북페어에 꾸준히 참가하고 계시는데요, 참가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숙지해야 할 것들에 대해 조언해주실 수 있을까요?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힘이 많이 나는 것 같아요. 여럿이서 생각하면 안 보던 포인트를 잘 보게 되고, 각자 잘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시너지가 많이 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여러 명을 모아서 일을 벌일 때가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저 혼자 하면 그림이나 책에서 끝나는데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고 싶거든요. 그러려면 사람도 모아야 하고 파급력이 커져야 하는 거죠. 콜렉티브로 친구들과 같이 참여하면 좋을 것 같아요.
10. 마지막으로, 작가님께서 앞으로의 작업 방향성에 있어서 새롭게 시도하거나 변화시키고 싶은 부분이 있을까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더라도 작업에서 불변하는 지점이 있을까요?
펜에서 끝나지 않고, 여러 가지 재료를 계속 써볼 것 같고, 삶의 부조리나 죽음 같은 주제들을 다루어 보고 싶어요. 그리고 자전적으로 저에서부터 출발한 주제를 그려왔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경험을 해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에서부터 작업이 쌓여 나갈 것 같아요.